
박영규 배우님의 노래 '카멜레온'을 참 좋아한다. 그 쌈뽕한 맛의 노래 반주와 중후한 톤의 목소리가 참 잘 어울린다.
노래 가사 속 '카멜레온'은 사랑만 주고 떠나간 이별의 방랑자라고 묘사된다. 어떤 상황이었길래, 떠나갔을까.
실제 카멜레온은 방랑자라는 느낌보다는 '예민보스'에 가깝다. 주변 환경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동물이다. 미세한 온도 변화와 습도의 차이로 생사를 넘나들며, 피부색의 변화는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기 위함도 있지만, 감정 표현에도 사용된다.
"무엇을 가장 좋아하세요?"
굉장히 단순하고 가벼운 질문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요즘 제일 답변하기 무거운 질문이다.
나는 딱히 불호가 없다. 가리는 반찬 없이 다 먹고, 같은 메뉴를 한 달 내내 먹어도 상관없을 만큼. 웬만하면 다 맛있고, 웬만하면 그냥 입고, 쓴다. 예전에는 사소한 아집들이 있었다.
"라면은 꼭 정수기 물로 끓여야 해", "펜은 무조건 0.5mm 여야 해", "김치찌개에는 반드시 삼겹살이 들어가야 해" 같은 고집들. 하지만 요즘은 더러운 물만 아니면 아무 물이나 쓰고, 펜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걸 대충 주워 쓰며, 김치찌개에 참치가 들어가든 깍두기가 들어가든 맛있게 먹으며 살고 있다.
이러한 무던함이 쓸데없는 생각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는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문득, 정말 연관성 없는 박영규 배우님의 '카멜레온' 노래를 들으면서 깨달았다.나의 취향이 흐릿해지고 있는 건가?
사실 노래만 들었다고 깨달은 건 아닌 거 같다. 창업을 준비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나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가 많았다.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나로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나'를 소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MBTI처럼 나의 취향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걸 좋아하고 이런 걸 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면 상대가 나를 파악하기 쉬워지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자기소개를 쉽게 할 수 없었다. 술을 만들고 있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술 종류가 없고, 어떤 안주가 최고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서울에서 홍성으로 내려온 이유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어느 술이든 마시는 게 즐겁고, 안주는 눈앞에 있는 음식이 최고이며, 홍성은 거창한 낭만이 아니라 그저 내려와 보니 너무 좋은 사람들이 있어 정착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취향'이라는 틀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밋밋해 보였다.
그래서, 흐릿해진 취향을 바로 잡아보고자 한다. 검색창에 '취향 바로잡기'라고 검색해 보았다. 나만의 취향을 찾는 프로그램 광고들이 많이 보였다. 아니, 이걸 돈 주고 배우다니. 요새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 찾는 것조차 귀찮아해서 타인에게 맡기는 것인가.
그래서, 나만의 질문에 답변하기 연습을 해보았다.
Q1) 떡볶이 떡은 밀떡을 좋아하세요? 쌀떡을 좋아하세요?
음... 문제가 생겼다. 40분 동안 고민을 해보고, 밀떡과 쌀떡의 차이점에 대해서 제미나이에게 물어보고 했지만, 이것은 내 취향이 아니라 그저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었다. 솔직히 무슨 떡이든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되지 않은가?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하고 적응하는 동물이다. 카멜레온처럼.
그렇다. 나는 적응을 잘하는 인간이다. 최근 읽은 책 '나무의 시대'에서는 인류의 진화가 털을 잃은 후부터 비약적으로 진보했다고 말한다. 보호막이었던 털을 잃고 맨살을 드러내게 된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 예민해진 피부 덕분에 주변 환경을 더 세밀하게 느끼고 적응하며 지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동안의 고집적인 털들을 잃어버린 '탈모' 덕분에, 지금의 '나'가 되었나 보다.
비록 지금은 떡볶이 떡 하나 고르지 못해 인공지능에게 물어보는 우유부단한 카멜레온 같을지라도, 이 예민한 적응력이 내가 빚는 술에도 배어 나오길 기대해 본다.
박영규 배우님의 노래처럼, 쌈뽕한 나만의 색깔을 드러낼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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